세바스토폴 포위전 (1941년~1942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세바스토폴 공방전이 시작되다.
세바스토폴 포위전 또는 세바스토폴 방어전(러시아어: Оборона Севастополя 오보로나 세바스토폴랴[*]), 세바스토폴 전투(독일어: Schlacht um Sewastopol, 러시아어: Битва за Севастополь 비트바 자 세바스토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군사 교전이다. 이 작전은 추축국의 나치 독일과 루마니아 왕국이 크림반도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인 세바스토폴을 점령하기 위해 소련을 상대로 벌인 전투이다. 1941년 6월 22일, 추축국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을 침공했고 1941년 가을에 추축국 육군은 크림반도에 도달하여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했다. 추축국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은 유일한 목표는 세바스토폴이었다. 1941년 10월과 11월에 도시를 확보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 11월 말에 대규모 공격이 계획되었으나, 폭우로 인해 1941년 12월 17일까지 지연되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지휘 아래 추축군은 이 첫 작전 동안 세바스토폴을 점령할 수 없었다. 소련군은 1941년 12월 케르치에서 크림반도에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포위망을 완화하고 추축국이 병력을 돌려 점령지를 방어하게 만들었다. 이 작전은 당분간 세바스토폴을 구원했지만, 크림반도 동부의 교두보는 1942년 5월에 제거되었다.
세바스토폴에 대한 첫 공격이 실패한 후, 추축군은 1942년 중반까지 포위전을 수행하기로 결정했고 그 시점에 포위된 소련군을 육상, 해상, 공중으로 공격했다. 1942년 6월 2일, 추축국은 스퇴르팡(Störfang, 철갑상어 사냥)이라는 코드명의 이 작전을 시작했다. 소련 붉은 군대와 흑해 함대는 추축국의 맹렬한 폭격 속에서 몇 주 동안 버텼다.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은 포위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제8항공군단은 포위된 소련군을 무방비로 폭격하여 6월 한 달 동안 23,751회 출격하고 20,528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독일 공습의 강도는 이전에 바르샤바, 로테르담, 런던과 같은 도시에 대한 독일의 폭격 공세를 훨씬 능가했다. 포위전이 끝날 무렵 세바스토폴에는 손상되지 않은 건물이 11채밖에 남지 않았다. 루프트바페는 해상으로 병력을 철수시키려는 소련의 대부분의 시도를 저지하거나 격침시켰다. 독일 제11군은 스퇴르팡 작전 동안 46,750톤의 포탄을 발사하여 방어군을 제압하고 섬멸했다.
결국 1942년 7월 4일, 잔여 소련군은 항복했고 독일군은 항구를 점령했다. 소련 독립해안군은 섬멸되었는데, 최종 공격에서 118,000명이 전사, 부상 또는 포로가 되었고, 포위전 전체에서는 해군을 포함하여 200,48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스퇴르팡 작전에서 추축국의 사상자는 35,866명이었으며, 이 중 독일군이 27,412명, 루마니아군이 8,454명이었다. 소련군이 무력화되자 추축국은 그 해 여름의 주요 작전인 청색 작전과 캅카스 유전으로의 진격에 다시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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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 한눈에
1941년 무렵 다른 지역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1939년), 냉전(1945년), 국제 통화 기금(1945년) 같은 일이 있었다. 같은 지역에서는 바로 앞서 마흐노우슈치나(1918년), 뒤이어 드네프르강 전투(1943년)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같은 시대의 다른 주요 사건은 근대 주요 사건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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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지역의 앞뒤 사건
- 리바디아궁 개관 1910년
- 크림 인민공화국 1917년
- 마흐노우슈치나 1918년
- 오데사 포위전 (1941년) 1941년
- 우만 전투 1941년
- 드네프르강 전투 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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