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랑크 왕국
파리 포위전: 노르드인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120개의 랑스킵 함대(5,000명)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센강에 진입하여 루앙을 약탈하다. 서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 2세 칼부스가 수도인 파리를 보호하기 군대를 모아서 파견하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적군을 궤멸시키고 111명의 포로를 교수형에 처함으로써 오딘에게 경의를 표하다. 칼부스가 왕국의 약탈을 막기 위해 - 떠나는 대가로 은 또는 금 7,000리브르(파운드)상당의 공물을 지불하다. 이후 바이킹들이 함부르크와 믈룅을 약탈하다.
서프랑크 왕국(라틴어: regnum Francorum Occidentalium 레그눔 프란코눔 오시덴탈리움[*], 프랑스어: Francie occidentale 프란시 오키덴탈[*], 독일어: Westfrankenreich 베스트프란켄라이흐[*])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세 부분으로 나뉜 카롤링거 왕가의 프랑크 왕국 중에서 서쪽에 위치한 왕국을 말한다. 베르됭 조약의 결과로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인 카를 2세(772? - 811)이 차지한 영토이다. 987년 카페 왕조의 시작까지 이어진다.
서프랑크 왕국은 현대의 프랑스 본토보다 북쪽과 남쪽으로는 길고, 동쪽으로는 짧았다. 일례로 나중에 프랑스의 일부가 되는 로렌, 부르군트 자유백국, 알자스, 프로방스 등은 서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아니었다. 또한 서쪽의 브르타뉴반도 역시 포함되지 않았다.
서프랑크의 왕들은 교회 및 속세의 권력자들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888년부터 936년까지의 반세기 동안에는 카롤링거와 로베르 가문에서 교대로 왕이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왕권은 점점 약해져 명목상으로만 남게 되었으며, 각 지방에 대해서는 귀족 등 지역 유력자들의 권력이 더 강해졌다. 로베르가는 파리 백작과 프랑스 공작이 된 후, 987년에 카페 왕조를 세우며 왕위에 올랐다. 카페 왕조의 성립 이후 서프랑크 왕국 대신 프랑스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프랑크라는 명칭은 당분간 유지되었는데, 1190년까지 카페 왕조의 군주들은 스스로를 프랑크인의 왕이라 칭했다가 1190년 1월 1일부로 필리프2세는 렉스 프랑코룸이라는 단어를 폐지하고 로이 드 프랑스(Roi de France)라 칭하였다. 역사가들은 이를 프랑스 왕국으로의 점진적 전환으로 정의한다. 13세기까지 "Regnum francorum"이라는 용어는 "Regnum Francia"("프랑스 왕국")로 발전했지만, "프랑크인"이라는 민족명은 18세기까지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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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 한눈에
843년 무렵 다른 지역에서는 키예프 루스(882년), 크메르 제국(802년), 프람바난(850년) 같은 일이 있었다. 같은 지역에서는 바로 앞서 아헨 대성당(801년), 뒤이어 플란데런 백국(866년)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같은 시대의 다른 주요 사건은 중세 주요 사건에서 볼 수 있다.
3D 지구본에서 보기 → 나무위키위키백과같은 시기, 다른 지역에서는
- 키예프 루스 882년
- 크메르 제국 802년
- 프람바난 850년
- 알카라윈 대학교 설립 859년
- 제2차 니케아 공의회 787년
- 헤이안 시대 794년
- 아글라브 토후국 800년
- 지혜의 집 설립 800년